등산 산호회

백두산공부<110625>

sanriro 2011. 6. 25. 17:27

 

백두산준비 안내 ⑤(백두산 공부)<110625>

 

 

흔히 관광을 할 때의 원칙 중에 “아는 만큼 보인다”란 말이 있지요. 이는 다시 말해 미리 공부하고 가라는 것이지요. 그런 차원에서 약 한 달 정도 남은 8월1일 백두산 등정에 앞서 미리 백두산에 관한 이모저모를 한 번 훑어보고 가면 좋을 듯해 약식 자료를 게재합니다. 내용이 다소 길지만 남은 기간 수시로 살펴보고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주요내용>

명칭/높이/역사/영토 국경/기후/외륜 내륜/천지/봉우리/폭포/수목생장한계선/관광/서파

 

 

 

 

 

백두산 명칭

 

 

양강도 삼지연군과 중국 지린 성[吉林省]에 걸쳐있는 백두산. 높이 2,750m로 한반도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북동에서 남서 방향의 창바이 산맥[長白山脈]과 북서에서 남동 방향의 마천령산맥의 교차점에 위치하는 화산이다. 화산폭발에 의해서 덮인 부석(경석이라고도 함)이 회백색을 나타내며, 꼭대기는 1년 중 8개월 이상 눈에 덮여서 희게 보이기 때문에 백두산이라 부른다. 중국에서는 창바이 산[長白山]이라고 하며, 만주어로는 '귀러민산예아린'이라고 부르는데 '귀러민'은 길다(長), '산예'는 희다(白), '아린'은 산을 의미한다.

문헌에 나타난 백두산 최초의 이름은 〈산해경 山海經〉에 불함산(不咸山)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단단대령(單單大嶺)·개마대산(蓋馬大山)·태백산(太白山)·장백산(長白山)·백산(白山) 등으로 불렸다.

한국의 문헌에서 백두산에 관한 기록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 三國遺事〉 기이편에 태백산(太伯山)이란 이름으로 처음 나타나며, 〈고려사〉에도 "압록강 밖의 여진족을 쫓아내어 백두산 바깥쪽에서 살게 했다"하여 '백두산'의 명칭이 문헌상에 처음 기록되었다. 한민족이 백두산을 민족의 성산(聖山)으로 본격적으로 숭상한 것은 고려시대 태조 왕건의 탄생설화부터라고 추정된다.

백두(白頭)라는 이름은 성해응(成海應)의 〈동국명산기 東國名山記〉, 이유원(李裕元)의 〈임하필기 林下筆記〉 등의 문헌에 의하면 백두산의 산정이 눈이나 백색의 부석(浮石)으로 4계절 희게 보여서 희다는 뜻의 '백'(白)자를 취하여 이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면 백두산이 위와 같은 산명(山名)에 나타나는 정신적 의미는 무엇일까. 우선 태백산(太白山)과 백산(白山)의 의미를 살펴 보면 광명사상(光明思想)과 연관됨을 알 수 있다. 먼 옛날 우리 선민(先民)들이 모여 살던 집단 거주지 부근의 고산(高山) 명산(名山)의 이름을 대개 이렇게 광명(光明) 신성(神聖)한 산악(山岳)이라는 의미로 '밝달' 또는 '밝뫼'로 불렀으며 그것이 한자명 '백산(白山)'등으로 옮겨진 것으로 판단된다.(육당 최남선의 '故事通' 참조)

따라서 백산, 태백산은 곧 우리말 이름 '밝달(뫼)', '한밝달(뫼)'를 그대로 한자로 옮긴 것이며, 후일 백두산의 명칭 또한 광명사상(光明思想)과 밀접한 '밝달'에서 유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음으로 '불함(不咸)'과 '개마(蓋馬)'의 명칭을 주목해 보자. '불함'은 그 음이 보여 주는 바와 같이 '밝달'의 '밝'이나 또는 '밝음' '붉음'과 통할 수 있다.

이미 최남선의 <불함문화론(不咸文化論)>이나 안재홍의 <조선상고사감(朝鮮上古史鑑)>에서 광명인 '밝'과 '불함'을 같은 의미로 간파하면서 '불함산'이 곧 '백산(白山)' '백악(白岳)'이라고 밝히고 있다. 또한 고어(古語)에 있어서 '화(火)'의 의미인 '불'과 '광명'의 의미인 '밝음'의 의미는 서로 통하는 바가 있으며 '블-□[ㅂㆍㄹ]-발-밝'이 전변(轉變)하여 온 사실을 볼 수 있는 만큼 '불함'의 산명(山名)과 '백(白)'의 산명은 동의이서(同意異書)라고 말한다.

끝으로 '도태(徒太)'의 의미 역시 '한밝[太白]'의 뜻을 갖는다. <위서(魏書)>에서는 '도태'의 의미를 위(魏)나라 말로 태백(太白)이라 한다는 기록이 있고 <신당서(新唐書)> <말갈전(靺鞨傳)>에 적힌 '태백산(太白山)'을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한다는 내용으로 보아 '도태'라는 말이 다름아닌 우리말 ' 한밝달(뫼)'을 한자로 옮겨 쓴 지방어(地方語)임을 확인할 수 있다.

백두산의 이명(異名)인 '불함(不咸)', '개마(蓋馬)', '도태(徒太)' 등은 모두 '밝달' '한밝달'의 의미가 한자로 이기(異記)된 것 뿐이며 백두산이 명칭 역시 '밝달'-'백산(白山)'의 과정을 지나 정착된, 고귀한 정신적 의미를 담은 것이라 하겠다

 

 

백두산의 높이는 2,750m

 

 

오랫동안 백두산의 높이는 2,744m로 알려저 왔으나 2750m로 수정되었다. 해방 당시까지 최고봉은 병사봉(2,744m)으로 측량되었으나, 현재는 장군봉으로 이름이 바뀌고 해발고도도 2,750m로 다시 측량되었다.

백두산 제1고봉인 장군봉(2,750m)

백두산 높이는 2,750m…알려진 것보다 6m높아

백두산의 높이는 2,750m. 국가정보원이 최근 펴낸 「북한 전도」에 따르면 백두산의 높이는 지금까지 알려진 2,744m보다 6m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각종 지리부도와 초·중·고교 교과서의 내용도 이에 맞게 고쳐야 할 것으로 보인다. 국정원 관계자는 19일 『북한 전도는 최근 북한 과학원이 펴낸 지도를 입수, 내용을 그대로 옮겨 만들었다』고 말했다. 국립지리원측은 『북한은 이 지도 제작을 위해 최신 측량기술을 총동원했다고 선전하고 있는 만큼 백두산 높이도 2,750m가 맞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백두산 높이 2,744m는 1910년대 일제가 측량한 것. 해방 이후 남한측은 백두산 높이를 측량할 기회가 없어 일제의 측량 결과를 지금까지 지리부도 등에 그대로 사용해 왔다.

지리 전문가들은 백두산의 높이가 달라진 것에 대해 여러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꼽힌 것은 측량기기의 발달로 인한 정확도 차이. 국립지리원 관계자는 『일제때 측량장비는 정확도가 떨어져 실제 높이를 제대로 재지 못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북한이 최신기기를 이용해 쟀다면 일제때 측량결과보단 훨씬 더 정확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백두산의 융기 가능성도 제기된다. 백두산이 사화산이 아니라 휴화산이며 화산 활동을 통해 매년 「키」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94년 중국학자들은 백두산 일대의 지진 기록을 연구한 결과 백두산이 매년 3㎜씩 치솟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고 밝힌 바 있다.

한편 94년 한국과 중국 과학자들은 백두산과 일대의 지질을 탐사한 결과 심저에서 화산활동이 감지됐으며 백두산이 2000~2050년 사이에 대규모 폭발을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하기도 했다.

 

 

백두산 역사

 

 

백두산의 문헌에 의한 최초의 이름은 불함산으로 《산해경(山海經)》 <대황북경(大荒北經)>에 기재되어 있다. 한(漢)나라 때에는 <단단대령(單單大嶺)>, 남북조 위(魏)시대에는 <개마대산> 또는 <도태산> <태백산>으로, 금(金)나라 때는 <장백산>이라 불렸다. 고려의 기록으로는 《삼국유사》<고조선조>에 <태백산>이라 칭하였으며, <백두산>이란 명칭은 《고려사》의 광종 10년에 처음으로 문헌에 나타난다.

백두산은 산세가 장엄하고 자원이 풍부하여 역사상 단군조선·부여(夫餘)·고구려·발해(渤海)·금·청(淸) 등 이곳과 관련을 갖지 않은 나라가 없다. 백두산은 일찍부터 한민족(韓民族)의 발상지로 또 개국의 터전으로 숭배되어왔던 민족의 영산(靈山)이었으며, 민족의 역사와 더불어 수난을 같이 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삼국유사》 <고조선조>에 인용된 고기(古記)의 기록에 의해 단군신화의 탄생무대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백두산이 200∼300년을 주기로 분출했던 휴화산이었던 점으로 미루어 한민족의 직접적인 거주지였다기보다는 불을 뿜어내는 성역으로 간주되어, 인지가 발달하지 못했던 선사시대에 민족의 시원(始原)을 말해주는 신화의 무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민족의 기원설화를 안고 있는 까닭에 인간의 거주가 제한되었을 것으로 짐작되므로 선사시대의 유물·유적의 발굴을 기대하기 힘들며 발견·보고된 바도 없다.

삼국이 정립되기 이전의 시기에는 백두산을 중심으로 남서쪽에는 고구려, 서쪽에는 부여, 북쪽에는 읍루, 북동쪽에는 숙신(肅愼), 동쪽에 동옥저(東沃沮) 등의 북방유목민족이 주변에 흩어져 살았다. 고구려가 강성해진 이후에는 고구려의 세력권이었으며, 발해의 영토 안에 있었다.

연변지역에는 발해가 건설한 많은 성지가 보존되어 있는데, 발해 전기의 도성인 구국(舊國;돈화현 오동성)과 5경중의 동경 용원부(龍原府;훈춘현 팔련성), 중경 현덕부(顯德府) 등이 이 지역에 분포하여 있다. 이후 백두산은 통일신라나 고려의 영역외곽에 위치하여 북방 이민족의 활동무대가 되었다.

요(遼)를 건국한 거란이나 금을 건국한 여진족의 발상지도 이곳을 중심으로 하였다. 금은 1172년(명종 2)에 이곳을 산신으로 봉하여 영응왕(靈應王)이라 하였고, 1193년에는 개천굉성제(開天宏聖帝)로 책봉하였다. 고려 말∼조선 초기에는 여진족이 백두산을 경계로 흥경(興京)을 중심으로 압록강·두만강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후금이 건국되자 그들의 시원지로 간주하여 영경(靈境)이라는 제사를 지냈다.

청나라 때에는 이곳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과 거주를 제한하는 금봉책(禁封策)을 실시하였다. 조선시대에 세종(世宗)은 북방야인의 침범을 막기 위해 1434년(세종 16) 두만강 일대에 6진(경원·경흥·회령·부령·온성·종성)을 설치하였고, 1443년에는 압록강변에 4군(무창·자성·여연·우예)을 설치함으로써 백두산을 중심으로 압록강과 두만강이 천연적인 국경이 되었으나, 백두산 일대는 너무 광활하여 국경선을 확연히 할 수 없었다.

조선과 중국의 문헌 중 1677년(숙종 3;淸 康熙 16)에 무목납(武木納) 등 4인을 백두산에 파견하여 실황을 조사·기록한 《장백정존록(長白征存錄)》이 백두산 답사기록으로는 최초일 것이다. 1712년(숙종 38) 5월에는 국경을 확실히 하자는 청의 제의에 의해 오라총관(烏喇總官) 목극등(穆克登)과 조선 군관 이의복(李義復)과 조태상(趙台相)이 백두산의 분수령인 높이 2150m의 지점에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이 비가 백두산에 전하는 금석문으로서는 최초의 유적이다. 이 정계비는 높이 72㎝의 6각기둥으로, 비문에 <서쪽은 압록강이고 동쪽은 토문강이다 …(西爲鴨綠 東爲土門 …)>라고 새겼다. 그 후 1880년(고종 17)부터 청나라는 돌연 토문이 두만(豆滿)을 뜻함이라는 억설을 주장하여 논란이 되더니, 1909년(순종 3) 만주 침략의 야욕을 가진 일본이 북경에서 청나라와 회담하고 토문강에서 훨씬 남하하여 두만강이 한·청 두 나라의 국경이라고 임의로 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한국의 영토이던 간도(間島) 전역을 청나라에 넘겨주었다. 이로 인하여 두만강이 중국과의 국경선으로 결정되었다. 따라서 백두산은 현재까지도 중국과 북한의 영토로 양분 되어있는 상태이다.

일제강점기의 백두산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무력항쟁의 기지로서 더없이 좋은 곳이 되었다. 1920년 6월 백두산 기슭의 봉오동(鳳梧洞)에서는 홍범도(洪範圖)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이 일본군과 격전 끝에 최대의 승전을 하였다. 백두산은 이처럼 항일의 전승지로서 독립운동사에 그 이름이 빛날 뿐만 아니라 6·25 때에도 개마고원유격대가 전투부대를 조직하여 인민군과 싸웠던 활약은 유명하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북한과 중국 간의 담판 과정에서 ‘백두산천지의 55%는 중국령, 45%는 북한령’ 등으로 영토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백두산 영토 및 국경문제

 

 

한민족에게 백두산은 민족과 국가의 발상지이며, 생명력있는 산으로서 민족의 성산(聖山)·신산(神山)으로 숭앙되어왔다. 고조선 이래 부여·고구려·발해 등이 백두산에 기원을 두고 있다.

백두산은 한민족뿐만 아니라 북방 이민족의 정신적 구심점과 활동무대가 되어왔으며, 이곳을 중심으로 국경문제가 발생하게 되었다. 17세기 중엽 청나라는 백두산을 장백산신(長白山神)에 봉하고 출입·거주를 제한하는 봉금정책을 실시했다.

그러나 조선사람들이 두만강을 넘어 이주·개척하자 백두산을 그들의 영토로 귀속시키려고, 1712년 일방적으로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 그 내용 가운데 토문강에 대한 해석의 차이로 청나라와의 사이에 영토분쟁이 발생했으며, 간도 및 녹둔도의 영유권 분쟁의 원인이 되었다.

1909년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협약으로 두만강이 국경선으로 결정되었으며, 지금 백두산은 천지까지도 분할되어 천지 북쪽 2/5는 중국측에, 남쪽 3/5은 북한 측에 속한다.

국내 백과사전이나 전문가 견해에 따르면 중국과 북한의 국경은두만강과 압록강이다. 이건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두 강의 발원지가 곧 백두산 정상의 천지(天池)다. 따라서 두만강과 압록강의 발원지를 끼고 있는 백두산은 필연적으로 중국과 한국 두 개 국가로 나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문제는 일제의 조선반도 침략 이전엔 백두산 전체가 우리 땅이었 다는 것이다. 전문가들은 “원래 두만강 이북의 간도는 우리의 영토(‘백두산 정계비’)였다”고 말한다. 하지만 일본이 철도부 설권에 대한 협상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간도를 중국영토로 편입 시킨 것이라는 게 학계의 정설이다. 학계 전문가들은 “이때부터 중국과 백두산 영토를 공유하게 됐고 이는 곧 일제에 의한 것” 이라고 말하고 있다.

한국전쟁 휴전 직후 북한과 중국 간의 담판 과정에서 ‘백두산 천지의 55%는 중국령, 45%는 북한령’ 등으로 영토 문제가 구체적으로 논의된 것으로 알려졌지만, 백두산의 절반이 중국으로 넘 어간 것은 이미 그때였다는 뜻이다.

1982년 6월 21일자 국내 신문에는 백두산 천지의 북쪽 부분 거의 절반이 중국영토로 표시된 중국 발행의 지도와 기사를 보도하여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중국 지린성 창바이산 자연보호관리국에서 간행한 《자연보호》라는 소책자에 수록된 백두산 부근 지도는 동쪽의 비류봉(沸流峰)에서 남서쪽 마천우(麻天隅)를 향해 일직선으로 줄을 그어 ‘국계(國界)’라는 국경선 표시를 하고 있다. 북한은 1962년 초부터 1963년 4월까지 국경선 비밀협상을 벌여 두만강을 경계로 하는 국경선은 밝혔으나 백두산에 대해서는 일체 발표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기사>: 中, 백두산마저 노리나 -제2동북아공정 파문 전망

 

 

中 ‘백두산 세계자연유산 등록’ 추진 왜 ?-[문화일보] 2006년 07월 29일(토)

 

(::겉으론 “유적 보호” 속내는 ‘땅 굳히기’::)중국 지린(吉林)성 정부는 오는 200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 개최시기를 목표로 백두산의 세계자연유산등록이 결정될 수 있도록 준비 중이다. 왜 느닷없이 백두산일까. 중국이 백두산을 완전히 중국 땅으로 만들려는 속셈이 있는 것은 아닐까. 말이 성 정부지 실은 중앙정부의 능동적인 추진이 있지 않으면 불가능할 정도로 최근 백두산문제가 중국에서 급격히 이슈화하고 있다. 백두산은 그간 조선족 집단거주지인 옌볜(延邊)자치구에 서 관할해 오다 지난해 지린성당국이 성 직속기구인 ‘창바이산(長白山, 백두산의 중국 이름)보호개발관리위원회’를 신설해 관리를 맡겼다. 위원회는 앞으로 20억 위안(약 2400억원)을 투입, 백두산 중국 쪽 서쪽 비탈루트를 관광코스로 개발해 내년부터 연중 개방한다는 계획이다. 지금 건설 중인 창바이산 관광지구 내 비행장도 2008년 베이징(北京)올림픽이 열리기 전에 개장한다는 방침 아래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위원회 리잔원(李占文) 부주임은 중국 인터넷매체 취재단과의 인터뷰에서 “창바이산 구역의 보호와 개발 사업이 새로운 발전 단계에 진입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백두산뿐 아니다.

 

수많은 고구려 유적 일부가 이미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데 이어 발해의 수도였던 헤이룽장(黑龍江)성 닝안(寧安)시 보하이(渤海)진의 상경용천부 유적지가 세계문화유산으 로 등재를 기다리고 있다. 상경용천부 유적의 경우 지난 1963년부터 2년 간 중국과 북한이 공동조사단을 구성해 발굴하기 시작 했는데, 지금 발굴이 거의 끝난 상태다. 최근 한국 내에서 동북공정 문제로 시끌벅적해지자 중국은 한국인의 출입을 금지시키기 시작했다. 실제로 ‘백두산은 우리 땅’이라는 중국 측의 준비와 열의는 대단하다. 중국당국이 마련한 ‘문화 및 자연 유산 예비목록’에 는 모두 17곳의 지명이 나오는데, 이중 창바이산이 두 번째에 올 라 있을 정도다. 동북아지역 역사문화 전문가들은 “문제는 중국의 행동이 단순한 유적보호 차원이 아니라는 데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옌 볜자치구의 한 향토사학자는 “중국당국이 자국 영토에 있는 유적지나 명승지에 대해 세계유산으로 신청하는 것은 문화재보전 이라는 차원에서 바람직한 일”이라면서 “하지만 백두산 세계자연유산 신청은 시기적으로 동북공정이 기승을 부린 직후 시작된 것이어서 그 관련성이 없다고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창바이산은 2004년에 제정된 ‘중화(中華) 10대 명산’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문제는 백두산 등이 우리 민족에 대해 갖는 상징성, 그리고 최소한 영토를 반분하고 있어 일방이 독차지할 수 없다는 지리적 특수성이다. 전문가들은 “문화유산이든 자연유산이든 유산이란 전대의 것을 후대에 전할 가치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며 “ 백두산의 경우 중국이 세계유산으로 신청하면 완전히 중국 땅처럼 인식하게 될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지린성 산하 연구기관에서 동북아지역 문화사회학을 하는 한 학 자는 “중국이든 북한이든 남한이든 서로 자기네 땅이라고 일방 적으로 밀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협의가 필요하며, 남북한과 중국이 함께 세계유산으로 신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고 지적했다. 베이징 = 허민특파원 minski@munhwa.com

 

 

세계자연유산이란?

세계유산(World Heritage)은 1972년 유네스코 세계문화 및 자연유산보호협약에 따라 지정되기 시작했다. 정부 간 회의체인 세계유산위원회 결정으로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각 지역의 부동산 유산을 세 가지로 나눠 보존하게 된다. 문화유산, 자연유산, 이 둘을 혼합적으로 지닌 복합유산으로 분류된다. 백두산은 세계자연유산등록 대상에 해당된다. 인류가 공동으로 그 유산을 잘 보존하고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선언적 의미를 갖는데, 의무규정이나 강제규정은 없다.

 

 

中, 백두산마저 노리나-[조선일보] 2006년 07월 31일(월

 

[조선일보]중국의 백두산(중국명 창바이산) 개발이 심상찮다. 관할 행정기관을 따로 설립하는 데서 나아가, 유네스코에 세계자연유산과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하는 것을 추진 중이라고 홍콩의 친중국계 신문인 문회보(文匯報)가 29일 보도했다. 이 때문에 고구려·발해사를 자기 역사로 만들려는 ‘동북공정’과 마찬가지로 중국정부가 ‘백두산 공정’을 진행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 쏟아지는 백두산 프로젝트

중국은 백두산을 국가지질공원으로 이미 등록한 상태이다. 세계지질공원은 지질학적 희소성을 갖추고, 자연경관이 수려하며 지질유적이 잘 분포돼 있는 곳에 대해 유네스코가 전문가위원회를 통해 지정한다. 중국에는 이미 8곳이 세계지질공원으로 등재돼 있다. 백두산을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하는 작업은 세계지질공원보다 더 많이 진전된 상태이다. 지린(吉林)성 산하 창바이산 보호개발관리위원회 리잔원(李占文) 주임은 지난 22일 중국 인터넷매체 취재단을 만나 “창바이산을 2008년까지 세계자연유산으로 등재한다는 목표로 내년 2월 이전에 유네스코에 등재 신청서를 제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백두산 공항은 이미 건설 중에 있다. 지난 10일 국가발전개혁위원회와 민항총국 등 중앙부처 관계자들까지 대거 참석한 가운데 백두산 정상에서 직선으로 10.6㎞ 떨어진 푸쑹(撫松)현에서 ‘창바이산공항’ 착공식이 열렸다. 백두산까지 이어지는 3개의 고속도로도 연내 착공될 예정이고, 백두산 순환도로 건설도 계획 중에 있다.

 

□ 왜 백두산 개발인가

표면적인 이유는 백두산 자연문화를 종합적으로 보호·관리하고, 관광산업을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왕민(王珉) 지린성장도 “창바이산의 보호·개발·이용은 지린성 경제사회 발전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고 강조했다. 백두산의 절반가량이 중국영토에 포함돼 있기 때문에 중국영토 내의 개발 사업을 문제삼기 곤란하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비판여론을 의식하지 않고 이 사업을 강행하는 것은 국제사회에 백두산의 소유권이 중국에 있음을 인식시키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8월 지린(吉林)성 직속으로 ‘창바이산 보호개발관리위원회(이하 창바이산관리위)’를 설립하고, 그 전까지 옌볜(延邊)조선족자치구 산하 4개 관광개발구가 맡고 있던 백두산 개발·관리 업무를 이관시켰다. 당시 옌볜지역 조선족들은 “조선족들의 손에서 백두산 관할권을 빼앗아가는 것은 민족의 상징을 빼앗는 것”이라며 크게 반발했으나, 관할권 이관을 막지는 못했다.

(베이징=조중식 특파원 [블로그 바로가기 jscho.chosun.com])-

 

 

백두산 기후

 

 

백두산 기후는 전형적인 고산기후이며, 한국에서 기후변화가 가장 심하다. 3대가 덕을 쌓아야 일출을 볼 수 있다는 지리산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연평균 기온은 6∼8℃, 최고기온 18∼20℃, 7월 의 평균기온은 8.5℃, 6~9월의 4개월간 10℃이상으로 오르지 않는다.

풍향은 주로 여름철에 서풍 또는 남서풍이며, 겨울철에는 북서풍이다. 풍속은 최대 초속 60m, 연평균 강수량은 1500㎜(2500㎜나 되어 우리나라 최다우지대라는 설도 있다),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나 되고 기상상태가 변화무쌍하고 천지 부근은 강한 돌개바람인 용권이 자주 일어난다. 백두산 산행에는 안전을 위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다.

남쪽의 더운 공기와 몽골지방에서 오는 찬 공기가 마주치면서 구름과 안개가 많이 끼는데 7~8월에 안개가 끼는 날수는 33일 가량 되며, 구름이 많고 천둥현상이 잦으며 주로 눈·비를 동반한다. 벼락회수는 연간 48회이고 연평균 강수량은 1,500mm이며, 겨울 날씨가 연중 230일 정도 계속된다.

백두산 산정과 천지 일대의 겨울은 사실상 9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지속되며 식물이 자랄 수 있는 기간은 7,8월 두달 뿐이다. 연평균 기온은 섭씨6도에서 8도, 연중 최고기온은 섭씨 18도에서 20도, 최저기온은 섭씨 영하 47도 정도이다.

 

 

백두산 외륜과 내륜

 

 

천지는 원형화구로 안쪽을 내륜, 바깥쪽을 외륜이라 한다.

 

 

백두산의 정상부에 있는 천지는 원형화구로 그 주변에는 해발고도 2,500m 이상의 16개 봉우리들에 의해 병풍처럼 둘러싸여 있다. 천지수면으로부터 500-600m 높이로 천지를 둥그렇게 둘러 싸고 있는 이 봉우리들을 외륜봉 또는 외륜산이라고 한다. 즉 중앙의 분화구(噴火口)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고리 모양의 산이 외륜봉이다. 천지 안쪽으로는 천지수면까지 이르는 경사를 내륜이라고 한다.

다시 말해 천지를 둘러싼 봉우리 바깥쪽이 외륜 안쪽이 내륜이다. 내륜(內輪)은 경사가 급하고 외륜(外輪)은 내륜보다 완만하다. 천지의 동남쪽은 북한, 서북쪽은 중국 지역, 중국 쪽의 사면에서는 해발고도 1,000~ 1,800m 55㎞의 거리가 경사도 8~12°의 완만한 현무암고원이다. 해발고도 1,800~2,500m는 보다 급경사(35~40°)의 종 모양 화산을 나타낸다.

아래 천지를 원형으로 둘러싼 봉우리의 천지 안쪽을 내륜이라 한다.

 

 

천지(天池) - 백두산 산정에 있는 자연호수

 

 

천지 수면 높이 해발 약 2,190m, 전세계 화산호 중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천지, 천지에 담긴 물의 양만도 소양호의 3분의 2 정도나 되며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북쪽의 달문을 통하여 1일 유출되는 양이 약 36만㎥(7월)에 이른다. 이러한 천지가 어떻게 형성되었고 담수되는 것일까?

 

 

천지의 명칭, 크기와 물

천지는 천지 창조의 신비함을 간직한 천상의 호수라는 뜻으로 대택, 대지, 용왕담, 달문담, 신분, 용궁지, 천상수, 달문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천지는 호수면이 해발 2,190m, 면적 9.165㎢, 둘레 14.4㎞, 평균너비 1.975㎞, 최대너비(동서) 3.550㎞, 평균수심 213.3m, 최대깊이 384m이다. 수심은 남쪽이 얕다. 세계 최고로 알려져 있는 '티티카카호'(최고수심 304미터)와 2위인 소련의 레닌그라드 근처에있는 '라도가호'(225 미터) 보다도 더 깊어 세계 최심의 산상 호수로 밝혀졌다.

화산활동에 의해 백두산 화구가 함몰되어 생긴 칼데라 호로, 분화구의 전체면적 가운데 천지가 차지하는 비율은 40.6%에 이른다.

백두산의 최고봉인 장군봉(2,750m), 백운봉(2,691m)·청석봉(2,662m) 등 높은 봉우리에 둘러싸여 있다.

 

 

천지물의 담수량과 유입

천지의 저수량은 약 20억 km. 1990년 초 조사에 의하면 천지 물의 내원은 대기강수(빗물), 집수구에서 흘러 드는 지표수와 지하에서 공급되는 지하수라고한다. 세 가지 내원 가운데 지하수의 공급량은 전체 천지 공급수량의 61.5%를 차지한다. 다음으로 천지 호면에 내리는 빗물은 1년 사이에 천지에 공급하는수량이 30.76%를 차지합니다.

다음으로는 천지 집수면적 50.57km. 천지에 흘러드는 지면 경류. 공급되는 수량은 천지 공급수의 7.73%를 차지한다. 이처럼 천지의 중요한 내원이 지하수이기 때문에 여름철에도 천지 물은 차고시원하다. 이와 같은 물의 유입과 강수량이 많고 기온이 낮아 물의 증발량이 낮아 천지의 물은 물은 마르지 않고 있다.

표면수온은 7월에 9.4℃, 내부수온은 연중 4℃이다. 물은 10월 중순부터 이듬해 5월 중순까지 약 3m의 두께로 어는데 그 위에 쌓이는 눈의 두께까지 합하면 6m 이상 된다.

천지 일대에는 구름과 안개가 자주 끼며, 여름철에 비가 많이 온다. 연강수량은 1,500㎜이며, 바람이 강하게 불 때는 수면 위로 최대 1~1.5m의 파고가 일기도 한다.

 

 

천지물은 어디로 흘러가는가

천지 물은 화구벽이 터져서 생긴 북쪽의 달문을 통하여 흘러내려 비룡폭포(68m), 장백폭포(長白瀑布:70m)를 이루면서 송화강(松花江)의 상류인 이도백하(二道白河])로 흘러간다. 달문을 통해 유출되는 양은 1일 약 36만㎥(7월)에 이른다. 이도백하 수문 관리소에서 측정한 자료에 의하면 장백폭포에서 일 년 동안흘러 내리는 물의 양은 0.3866억 km. 천지 출수량의 93.16%를 차지한다. 연간 증발수량은 0.0284억 km.천지 총출수량의 6.84%.

 

 

천지 물은 마실 수 있는가

대부분 지하수이기에 무색, 무미하고 깨끗하고 찹니다. 천지물은 미생물의 번식률이 매우 낮거 적어 깨끗하다. 천지 물의 중탄산 함량은 주위 암석에 있는 나트륨장석의 분해로 일반적인 음료수에 비하여 약 10배 정도 더 많아 마시면 시원하다. 그러나 천지는 화산호이고 또 몇 곳에서는 온천이 나오기 때문에 인체에 유해한 화학원소들이 있어 음료수로는 적당하지 않다.

 

 

천지의 형성- 칼데라호 '천지'

백두산은 중생대부터 신생대 초에 걸쳐 1,000 내지 1,500 미터의 융기 고원상에 형성되었다가 다시 신생대 제 3기 말부터 제4기 초에 다량의 현무암이 분출하여 반경30리에 걸쳐 최초 종상화산을 형성한 뒤 차차 냉각됨에 따라 균열이 생기고 산정 부분이 함몰하여 칼데라호인 천지를 형성하였다. 우리 나라에 있는 단 하나뿐인 칼데라호이다. 량이 연평균 1340 mm나 되는데 우리 나라 전체 평균 강수량보다 많습니다.

대개의 화산활동은 화산이 폭발하는 정상부에 호수를 만드는 것이 공통된 특징 가운데 하나로 볼 수 있다. 우리 나라의 경우도 화산활동이 활발했던 지역인 백두산과 한라산의 경우를 살펴보면, 산정상부에 호수가 생성되어 있음을 잘 알고 있다. 화산활동에 의해 형성된 호수는 성인에 따라 크게 칼데라호와 화구호로 구분된다.

 

 

칼데라호

칼데라호는 화산체가 형성된 뒤 대폭발이나 화산의 중심부분이 함몰되어 2차적으로 더 큰 와지가 된 뒤에 물이 고여서 된 호수다. 형태는 원형, 타원형이 대부분이고, 때에 따라서는 중앙 화구구의 분출 때문에 구옥상으로 되는것과 화산도를 갖는 환상의 것도 있다. 호안이 급사면이고 호저가 평탄한 것은 화구호와 비슷하지만 일반적으로 수심이 더 깊다. 수심 100미터 이상의 화산성 호수는 칼데라에 속하는 경우가 많다.

 

 

백두산 봉우리

 

 

백두산은 여러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데, 천지를 둘러싸고 있는 해발 2,500m이상인 봉우리만도 16개이며, 개는 북한에, 9개는 중국에 속해 있으며, 시대에 따라 이들 봉우리의 명칭이 달랐다.

제일 높은 봉우리는 장군봉(2,749.2m)으로 중국에서는 백두봉이라 한다. 두번째 높은 봉우리는 백운봉(2691m), 세 번째가 기상대가 있는 곳이 천문봉(2670m)이다.

중국측에서는 장군봉을 백두봉이라고 부르는 것을 비롯하여 삼기봉, 고준봉, 자하봉(2,618m), 화개봉, 철벽봉(2,560m), 천활봉, 용문봉, 관일봉, 금병봉, 지반봉(2,603m), 와호봉(2,566m), 관면봉등 16개 봉우리에 모두 명칭이 있다. 이러한 명칭은 1900년대 초에 붙여진 이름으로 한 봉우리에 2개의 명칭이 있어 구분이 어렵기도 하다.

비류봉(2,580m), 백암산(2,670m), 차일봉(2,596m), 층암산(2,691m), 마천우(2,691m) 등의 7개 봉우리에만 명칭이 전해지고 있다.

 

 

주요봉우리

 

북한지역 : 장군봉(백두봉, 병사봉) 2,744m, 해발봉 2,719m, 자하봉 2,618m, 제운봉(낙원봉) 2,603m, 와호봉 2,566m, 제비봉 2,549m, 비류봉 2,580m, 쌍무지개봉 2,626m,

 

중국지역 : 백운봉 2,691m, 천문봉 (백암봉) 2,670m, 청석봉(옥주봉) 2,662m, 자하봉 2,618m, 녹명봉(지반봉) 2,603m, 차일봉(용문봉) 2,596m, 철벽봉 2,550m,

 

 

<사진들>

천문봉에서 바라본 북한지역 봉우리 6

 

천문봉에서 바라본 북한지역 봉우리 7

 

천문봉에서 바라본 봉우리 8

 

천문봉에서 바라본 봉우리(중국지역 서파) 9

 

천문봉에서 바라본 봉우리(중국지역) 10

 

용문봉에서 바라본 북한지역 봉우리 11

 

용문봉에서 바라본 봉우리(중국지역 북파) 12

 

 

 

장군봉(백두봉)

천지의 동남쪽에 위치한 장군봉은 해발 2,749미터로 백두산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중국에서는 백두봉으로 부른다. 이 봉우리는 빙하가 깎아서 이루어진 것이다. 꼭대기에서부터 북쪽으로 천지 쪽으로 뻗은 등성이는 장관인데 맞은편 백운봉아래 등성이와 흡사하여 험한 봉우리 밑의 험한 봉우리로 알려졌다. 이것은 천지 안쪽 화산암이 이루어 놓은 지형이다. 끌차(잉크라인 철도)와 도로를 통해 정상에 오를수 있다. '장군봉은 북한에 위치하고 있어 일반인들은 오를수 없다

백운봉

천지의 서쪽에 위치한다. 백운봉(해발2,691미터)은 중국 동북지방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북으로 지반봉(녹명봉)과 1,260여 미터 떨어져 있고 남으로는 옥주봉과 면해 있다. 이 산은 둥근모양을 이룬 높은산인데 산세가 험준하고 가파르다. 해맑은 날씨에 뭇봉우리들이 각기 웅자를 드러낼 때에도 백운봉만은 종일토록 흰구름이 감돌기 때문에 백운봉이라 이름하였다. 꼭대기는 회백색, 담황색, 유백색의 부석들로 되어 푸른하늘 흰구름과 서로 대조를 이룬다.

 

천문봉

천지 기상관측소에서 서남쪽으로 400여 미터 되는 곳에 남쪽으로 화개봉과 325미터 마주 솟아있고 북으로 철벽봉을 등진 곳에 있다. 천지의 수면에서는 476미터, 해발 2,670미터의 높이를 가진 이 봉우리는 천지 북쪽 켠에서 가장 높은 산마루이다. 1958년 이 봉우리의 북쪽에 백두산천지 기상관측소를 세운 때 부터 기상대를 상징하여 천문봉이라 이름하였다.

봉우리 꼭대기에서 천지로 향한 '천상은병풍'에는 오색영롱한 비취 주옥들이 박혀 있다. '천상은 병풍' 앞에는 수리바위가 있고 동쪽에는 여의주를 희롱하는 외뿔 용이 하늘에 머리를 쳐든 듯한 용각봉이 있다.

 

청석봉(옥주봉)

천지 서쪽에 서북으로 백운봉과 1,270미터 떨어져 있고 남으로 현실애, 제운봉과 이웃한 곳에 위치한 옥주봉은 해발2,664미터이다. 꼭대기에 또 오형제처럼 다섯 봉우리가 뭉쳐 선 것이 마치 하늘이 무너지면 버티고 있을 듯 한지라 '백두의 옥기등' 이란 영예를 지니고 있다.

그 다섯 봉우리들은 푸른 암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청석봉이라고도 부른다.해발 2,500미터가 넘는 이 봉우리들은 천지쪽으로 향해 섰는데 깎아지 른듯한 절벽들에 '-'자를 가로 그은 듯 한 큰단층이 있다. 옥주봉 동쪽에서 솟는 샘은 금실같이 천지로 흘러 드는데 이것은 금선천이라고 한다.

 

용문봉(차일봉)

천지의 서북쪽에 승사하를 사이에 두고 천활봉과 대치되어 천지의 출구를 지키는 듯한 봉우리가 용문봉(해발 2,595미터. 천지 수면에서의 높이는 401.7미터)인데 북쪽으로 옥벽과 잇닿았고 서쪽으로 관일봉과 접하여있다. 두봉우리가 대문처럼 솟았다고하여 용문이라 부른다.이 봉우리들의 겉에는 화산이 이따금씩 분출하면서 형성한 용암의 흐름층면을 드러내고 있다. 부스러져 떨어진 바윗돌들이 큰돌사태를 이룬 면서 골짜기로 흘러내린 퇴석 위에 약한 고산식물들이 자라고 있다. 봉우리 꼭대기에 올챙이같이 생긴 바위가 있어 신비(神碑)라고 불리운다. 산허리에 덮혔던 눈은 8월에야 녹는다. 폭포 곁으로 해서 천지에 오르는 관광노선은 이 용문봉아래에 있다. 용문봉 북쪽에 낙차가 20미터인 은류폭포가 있어 옥벽을 사이에 두고 장백폭포와 이웃하여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녹명봉(지반봉)

천지의 서북쪽에 선부를 사이에 두고 백운봉과 이웃한 지반봉(해발2,603미터, 천지 수면에서 꼭대기까지 409.1미터)이 퐁곡으로 용문봉과 마주서 있다. 옛날에는 꼭대기의 진펄에 영지가 많이 자랐다고 해서 지반봉이라 부른다. 서쪽이 높고 동쪽이 낮은 산정에 네 개의 봉우리가 진펄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 봉우리들의 안쪽은 가파르게 생겨 천지 서북쪽의 장벽으로 되어 있다. 여름과 가을에는 녹평 등지에 사슴의 무리가 많다. 9월 중순, 눈이 내린 뒤에는 여기저기서 사슴의 발자국을 볼수 있다. 산기슭에서 사슴들이 뛰놀며 엇갈아 울 때면 산골짜기에 울리는 메아리가 듣기 좋아 녹명봉이라고도 부른다. 정상에는 화산 활동에 의해 생긴 분열구가있다. 엄동설한에 다른 산 봉우리들에는 백설이 눈부시지만 여기에는 누런 풀이 깔려 있어 늦가을의 경치를 연상케 한다. 북쪽에는 몇십 명이 들어앉을만한 동굴이 있다.

 

와호봉

천지의 서남쪽에 위치한 와호봉(천지 기슭으로부터 봉우리 정상까지의 거리는400여 미터)은북쪽으로 제운봉과 1,000미터 정도 떨어져 있고 남쪽으로 관면봉과 이웃 해 있다. 이 봉우리 역시 두 나라의 경계봉인데 "호수 가까이에 호랑이의 발자국이 많고 5리 남짓한 경사지에 호랑이가 다니는 길이 있다"고 하여 와호봉이라 부른다. 「무송현지」에 의하면 이 봉우리는 "엎드린 호랑이 형상이라 하여 와호봉이라 부른다고 하였다. 봉우리 기슭에는 녹경(鹿經),백화계(白花溪)등의 명승이 있다.

 

관면봉

천지의 바로 남쪽에 와호봉과 500여 미터 떨어져 있는 관면봉(수면에서 의 높이는 370.8미터, 해발2,525미터)이 한반도와 중국의 경계봉으로 솟아있다. 장백산강강지략」에 "장엄한 기상으로 옹기종기 모여 선 뭇봉우리 들이 마치 면류관같다"고하여 관면봉이라 이름하였는데 용문봉, 천활봉과 멀리 천지를 사이에 두고 마주서 있다. 흰 부석으로 이루어져 사철 흰색을 띠므로 눈인지 바위인지 알아보기 어렵다. 천지를 마주한 쪽에는 사철 눈이 쌓여 녹을 줄을 모른다.

 

 

백두산 폭포

 

 

백두산에는 폭포가 60여개 있다. 높이 40m의 백두밀영폭포와 높이 20m의 백두폭포를 비롯해 일정한 거리를 두고세번이나 꺾어내리는 사기문폭포, 두개의 폭포가 바위벼랑에서 가지런히 떨어져 내리는 형제폭포, 물이 벼랑중턱에 뚫린 구멍에서 쏟아져 내리는 리명수폭포는 백두산의 신비감을 더하고 있다. 백두산의 폭포는 모두 60여 개. 중국지역에는 장백폭포, 금강폭포, 옥계폭포가 대표적이다.

 

장백폭포 - 한폭의 비단을 드리운 듯

 

천지의 북쪽 천할봉과 용문봉 사이의 달문에서 흘러 1,250m 길이의 승사하를 이루고 지나 벼랑을 만나 낙차 68m의 장대한폭포를 이룬다. 거대한 폭음이 몇 리 밖에까지 울리며 흰 물보라를 흩날려 공중에 칠색무지개와 백룡이 날아내리는듯한 절경을 이룬다. 이것이 바로 장백폭포이다. 승사하 말단에서 폭포의 중간에는 큰바윗돌이 노출되어 한줄기로 내려오던 물줄기가 아쉽게도 두 갈래로 갈라져 쏟아지는데 68m 높이에서 90도 수직으로 암벽을 때리며 시원스레 떨어진다. 장백폭포는 마치 흰 비단이 하늘에서 내려오다가 중간쯤에 튀어나온 바위에 부딪히면서 두 폭으로 갈라져 백두산 중턱에 걸려 있는 듯하다.장백폭포는 일 년 내내 볼수 있다, 북방의 모든 폭포는 봄부터 가을까지 물이 있어 장관을 이루지만 겨울이면 물이 얼어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장백폭포 만은 겨울에도 얼지 않고 계속 흐른다.

 

장백폭포 사진 13

 

 

금강폭포

 

금강폭포는 서백두의 알프스 산 속 같이 아름다운 자연정원인 넓은 초원 금강분지에서 30여분 거리에 있다. 금강분지에서 폭포의 상류인 작은 계곡 건너 능선에 올라서 가파른 원시림 계곡을 내려가면 원시림과 깊은 계곡에 숨겨진 금강폭포가 있다.금강폭포는 2단 폭포로 74m이다 이 . 금강폭포에서 흐르는 물은 금강대협곡으로 이어진다. ! 1백만년 전 천지의 화산이 분출하여 용암이 휩쓸고 간 협곡이 수많은 세월속의 풍화작용으로 깊고깊은 협곡을 이룬다. 관광지로 개발되지않고 제한된 인원만 출입시키는 서파지역에 깊숙이 있는 금강폭포는 찾는 이가 많지 않아 원시림과 깊은 계곡을 함께 간직하고 있다.

 

금강폭포사진 14

 

 

은류폭포

용문봉 북쪽 0.5km 떨어진 협곡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폭포 상류강은 지하에서 흘러 보이지 않으나 폭포부근에서 지면에 노출되면서 높이 20m의 폭포가 형성되었습니다. 폭포물량은 우기에 많고 건기에는적으며 심지어는 물이 없을 때도있습니다. 이 폭포는 옥벽을 사이에 두고 장백폭포와 가지런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악화폭포

백두산 동쪽 비탈 삼도백하 상원에 있습니다. 이 폭포는 태원대와 사스래 나무림대(악화림)의 교계처에 있어 악화폭포라 하였습니다. 악화폭포는 급류가 불시에 20여m 되는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이루어지는데 먼 곳에서 바라보면 흰 비단이 하늘에 걸려 있는것 같습니다.

 

동천폭포

지하삼림(곡지 삼림) 입구 근처에 있습니다. 폭포의 높이는 약 15m인데 하곡은 매우 좁아 30km 안팎이다. 폭포밑은 지하에 있는데 모양은 원통상으로 되었습니다. 이 폭포는 세상에서 보기 드문 폭포입니다. 모든 폭포는 지상에 있으나 이 폭포만은 지하에 있어 잘 보이지는 않습니다. 폭포위에서 있노라면 지하에서 울려오는 폭음소리가 신비로움을 자아닙니다.

 

그중 이름난 폭포는 백두폭포(삼단 폭포), 이명수폭포, 천지폭포(장백폭포)등이 있습니다. 백두산에는 여름이 없는 반면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는 기간, 즉 겨울은 9월 하순부터 이듬해 6월 중순까지 9개월이나 됩니다.

 

 

수목생장한계선[樹木限界線, timberline]

 

 

고산 및 극지에서 수목이 존재할 수 있는 극한의 선. 교목한계선(喬木限界線)이라고도 한다. 환경조건의 변화 때문에 수목의 생육이 불가능하게 되는 한계선이다. 삼림 한계의 외측에 수목이 소생하는 추이대(推移帶)가 있어 이것으로 수목한계를 구분하는 것이 보통이다. 고산이나 고위도 지방에서는 저온, 습원(濕原)에서는 토양수분 과잉, 사막이나 사바나에서는 수분 부족, 극지방에서는 강풍이 한계를 결정하는 요인이 된다.

북극권에서는 침엽수의 삼림 한계의 북쪽에 자작나무류 ·오리나무류 ·버드나무류 ·미루나무류, 침엽수가 소생하는 툰드라대가 있어, 수목한계를 넘어서 수목이 없는 툰드라에 이어진다. 삼림한계선의 높이는 지방에 따라, 또 산의 사면(斜面)의 방위에 따라 다르다. 보통 고위도가 될수록 낮아지고, 북극지방의 수목한계선은 평지에 있다.

수목한계선 밖에는 관목이나 초본류 ·지의류 ·이끼류만을 볼 수 있다. 고산대의 하한(下限)이 삼림 한계인데 1년 중 가장 더운 달의 평균기온이 10 ℃인 선과 거의 일치한다. 이런 선은 북극으로 갈수록 평지에서 나타난다. 고산대의 하한은 북위 42 °의 백두산에서는 1,700 m이고 만일 제주 한라산이 더 높았더라면 2,500 m에 나타날 것이다. 한국의 고산대는 눈잣나무대라고도 하는데, 고산대를 상부와 하부로 나누면 하부에는 눈잣나무 군락이 나타나고, 상부에는 고산초원이 나타난다.

 

 

백두산 수목생장한계선

한기와 세찬 바람에 나무가 자라지 못하는 수목한계선의 높이는 지방에 따라, 또 산의 사면(斜面)의 방위에 따라 다르다. 백두산은 해발 1,700-2000미터. 1년 중 가장 더운 달의 평균기온이 10℃인 선과 거의 일치한다. 백두산은 7월 의 평균기온은 8.5℃, 6~9월의 4개월간 10℃이상으로 오르지 않는다.

백두산은 천지와 들꽃, 초원과 임해로 장관을 이룬다. 천지 외륜은 수목한계선 위에 있어 광활한 초원을 이룬다. 백두산 산행의 묘미는 이 광활한 초원을 걷는 것, 올려보아도 내려 보아도 시야에는 초원과 임해뿐. 이 초원 위에 야생화가 백두산을 또 다른 경관을 만든다. 수목생장하계선 위의 초원은 관목이나 초본류 ·지의류 ·이끼류가 만든 초원이다.

 

멀리서 보면 풀 같지만 아래사진은 관목이 잔디처럼 엉겨 붙은 관목군락 15

 

수목생장한계선 위의 초원 16

 

 

백두산 여행 / 산행

 

 

눈, 구름, 안개, 폭우, 강풍, 혹한, 이것이 백두산의 날씨다. 연중 변화무쌍해 쾌청한 날씨를 찾아보기 힘들다. 9월부터 다음해 6월까지 겨울이며, 봄이 되면 곧 여름, 가을로 이어져 버린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기후가 급변하고 구름에다 안개로 가려져 백두산의 전경을 보기가 어렵다.

여름에도 갑자기 기온이 낮아져 방풍복을 준비해야 한다. 기온은 연평균 6도 ~ 8도, 최고기온 18도 ~ 20도이며, 연중 눈, 비가 내리는 날이 200여일, 연중 강풍일수는 270일이다. 겨울 날씨가 1년 중 230일이다.

6월 초까지 눈에 덮여있는 백두산 등정은 한여름 장마철 보다, 6월 말에서 7월초, 8월 말에서 9월초(조금 미리 공부할 걸)가 적당한 시기이다.

 

 

산행코스

백두산 산행코스는 서파(서쪽백두산) 코스와 북파(북쪽 백두산) 코스로 나눈다. 서파는 비교적 완만하여 짚차에서 내려 청석봉아래 5호경계비가 있는 천지에 40여분이면 오른다. 천지에서 청석봉까지 오르는 코스와 북파까지 종주하는 코스가 있다.

북파는 관광코스로 기상대까지 짚차로 오른 후 5분이면 천문봉에 올라 천지를 내려다보는 관광코스이다. 장백폭포 좌우로 한정된 부분만 오르는 산행코스이다. 관광으로 간다면 북파코스, 산행으로 간다면 서파코스를 권한다.

 

 

 

서파 코스(우리가 갈 곳)

 

1. 종주코스: 서파-북파(외륜봉) 종주 코스(10시간)

청석봉아래 주차장(셔틀버스로 이동) - 천지(5호경계비)- 청석봉- 백운봉- 녹명봉-용문봉- 소천지

2.청석봉 왕복산행코스

청석봉아래 주차장(셔틀버스로 이동) - 천지(5호경계비)- 청석봉 - 주차장

3. 트레킹코스

금강대협곡, 금강분지-금강폭포, 왕지, 고산화원 트레킹 코스

 

 

북파코스

1.소천지 -용문봉 왕복 코스(5시간)

장백산국제호텔앞 소천지에서 용문봉까지 올랐다가 오른길로 되내려오는 왕복산행코스로 4시간 정도 소요된다.

2.전문 트래킹 코스(6시간)

장백폭포 - 천지 - 천문봉 - 흑풍구 -고래등 -원시림 - 사스래폭포 - 온천장으로 이어지는 코스이다. 약 6시간이 소요. 등산 전문가들이 주로 이용하는 코스이다.

3.천문봉-장백폭포 코스

삼거리에서 지프로 천문봉으로 올라간 후 하산시 도보로 천지, 장백폭포를 거쳐 온천장으로 내려오는 코스로 3-4시간이 소요된다. 반대 코스로 장백폭포에서 천문봉으로 올라간 후 지프로 하산할 수 있다.

 

용정 관광

연길시에서 버스를 타면 약20분정도 소요되는 거리에 연길못지 않게 우리 나라 역사와 연관이 있는 용정시가 있다.민족시인으로 알려진 윤동주가 중학교를 이곳에서 다녔고,박경리의 대하소설인 토지(土地,투띠)에 나오는 배경의 한 부분이기도 하다.그리고 무엇보다도 이곳은 일제시대에 우리 나라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의 많은 싸움터중의 하나이다.

용정시에서 연길로 조금 나오면 낮은 산이 있는데 그정상에 작은 정자가 있다. 이 정자가 선구자라는 노래에 나오는 일송정(一松亭,이쑹팅)이다. 이 일송정에서 보면 해란강이 유유히 흐르는 모습이 보이는데 자신의 나라를 떠나와 외로운 싸움을 했던이들의 깊은 서로움이 느껴지는듯하다. 용정에서 처음으로 조선족마을이 조성된 해는 1877년이라고 전해지고있다. 함경북도 회령의 리재민, 장인석, 박윤언 등과 평안북도의 김인상 등이 처음으로 14호를 거느리고 와집령(흔히 오랑캐령이라고 부른다)을 넘어 륙도하와 해란강 함수목(지금의 용정시 시교)에 이르러 강변의 황무지를 개간함으로하여 첫 마을이 시작되였다고 한다. 이것이 용정의 시초라 할 것이다. 용정은 우리 민족이 개척한 우리의 도시이다.그러므로 이곳에서는 지금도 70퍼센트이상이 조선족이므로 한족이 오히려 우리말을 배우는 현상이 많다.또한 용정은 우리 민족이 본격적으로 벼농사를 시작한 곳이라고도 한다.

 

 

백두산 서파(서백두)

 

 

백두산 서백두(서파)

백두산의 동남쪽은 북한, 북서쪽은 중국지역이다. 북한지역은 갈수 없기 때문에 북서쪽만을 관광과 산행을 할 수 있다. 백두산 중국지역 여행코스는 크게 서파(서백두)와 북파(북백두) 2코스, 파(坡)는 중국말로 언덕이란 뜻으로 서파코스라고 하면 백두산 서쪽에서 오르는 길을 의미한다.

천지를 중심으로 북파는 험준한 산세를 자랑하며 서파는 해발 2,000m 이상의 완만한 고산지대를 이루고 있다. 여름이면 광활한 초원지대와 지천에 야생화가 흐드러지게 핀다.

 

서파 생태관광 코스

서파트래킹 코스로는 천지관광(5호경계비), 들꽃 군락지인 왕지와 고산화원, 금강대협곡(장백산대협곡), 제자하 등이 있다.

서파를 들어가려면 서파 산문으로 들어가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도로가 포장되고 5호경계비 오르는 길에 돌계단이 설치 되는등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서파 산문 안은 셔틀버스로만 1시간 정도가 걸리는 코스로 최근에 중국인들의 많이 찾는 관광코스가 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주로 종주코스 기점으로 이용된다. 산문안에는 위락시설이나 매점 등이 없는 생태보호지역이다.

제자하는 거대한 용암이 지하로 흘러 생겨난 물이 흐르는 좁은 지하 통로 같은 것으로 위에서 내려다 본다. 금강분지에는 높이 80m의 금강폭포, 계곡물에서 솟아오르는 진주온천 등이 있다.

금강대협곡(장백산대협곡)은 계곡 길이 약15km, 골의깊이 70-100m, 넓이는 100-200m 경사가 급하며 V자 형상의 협곡이 굽이굽이 이어진다. 협곡의 물은 천지에서 발원 중국쪽 송화강을 이룬다.

왕지는 청나라의 성지로 왕지 눈앞에 드넓은 야생화 꽃천지가 펼쳐진다. 특히 붓꽃이 군락을 이루며, 약40분 정도 가로지르면 꽃밭이 끝날무렵 호수가 나타난다. 만주족의 성지 왕지다. 청을 세운 누루하치의 탄생신화가 얽힌 곳이다.

중국측은 백두산 서쪽지역을 관리하는 중국길림성 장백산국가급 자연보호구 서파여유국이 이곳을 세계적인 생태관광지역으로 보호하고 있다.

백두산 서편에서 즐기는 트레킹의 묘미는 천지 봉우리에서 뻗은 완만한 초원(수목생장선 위편)의 꽃대궐 구릉을 걸어 천지가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청석봉 능선까지 초원에 지천으로 피어난 들꽃을 보며 걷는 것. 누구나 오를 수 있을 만큼 경사가 완만하다.

 

 

5호경계비가 있는 천지 오르기 17

 

금강대협곡 18

 

왕지 가는 길의 들꽃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