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이야기

♣ 성지회 2017년10월 월례모임-닭도리탕 우정에 감동해서

sanriro 2017. 10. 14. 11:19




성지회 201710월 월례모임-닭도리탕 우정에 감동해서<171013>

 

sd16 城志會201710월 정기월례모임을 13오금동 닭볶음탕 전문식당홍이네에서 가졌다.

 

회원10명이 다 모였다. 有司晩翠(치형)이만취가 유치원 동기생 不繫(불계-손창인)이를 특별 게스트로 초청했다.(뭐꼬? 부산시절 유치원 동기생이라니, 유치원까지 동창생을 다 챙기나? ㅋㅋ). 그래서 11명의 일육 건아들이 모인 회식자리가 벌어지게 됐다.

 

이번 모임은 좀 각별(恪別)한 사연이 따른다. 회원 大朋(경식)이가 큰 친구라는 그  에 걸맞게, 지난 921일 성지회 카톡방에 감동적인 友情에 관한 글 닭도리탕을 올려, 회원들을 감동받게 만들었다.

 

글쓴이가, 폐암에 걸려 며칠 후 죽게 된조형용이라는 중학 동창의 부인을 만나, 밀린 병원비 3천만 원을 해결 못해 고심 중인 사정을 듣고, 본인이 먼저 1천만 원을 내고 카톡방을 통해 동창들에게 알려 적극적으로 동참들을 해서 모두 3천만 원을 모아 유족들에게 전했고, 그 유족들이 어려움 속에 닭도리탕 식당을 시작해 결국 조형용닭도리탕으로 크게 성공한 다음, 그 부인이 동창의 밴드에 가입하길 원해서 들어와. 첫 글로 동창친구들의 우정에 감사하면서, 덕분에 잘 자란 맏아들이 현대자동차 기획실에 근무하며 포상으로 받은 5천만 원을 몽땅 동창기금으로 내놓게 됐고, 지금 그 닭도리탕 집에서 동창들의 대소 모임이 열리는 한 편으로 거의 매일 10여 명은 모여서 우정을 다지고 있다는, 그런 흐뭇한 줄거리다.

(전체 내용은 아래의 글에서 보시길)

 

大朋의 올린 글에 一鼓성지회 모임 언젠가 그 닭도리탕 집에서 한번!!??”했더니, 晩翠가 당장 받아들여, 감동실화의 식당 서울 변두리 어디 메 그 닭도리탕 집은 아니어도, 성지회가 자주 만나는 송파 오금역 인근의 닭도리탕(닭볶음탕)집으로 월례 모임 장소를 정한 것이다.

 

이날 모임 장소에는 그런 우정 어린 닭도리탕집 사연에 대한 회원들의 공감이 함께 했기에, 모임에서 나누는 친구들의 대화와 수작(酬酌)은 어느 때보다 더욱 다정다감하게 느껴졌다.

 

뜻은 좋지만, 과연 맛은 어떨지? 만취가 우려했었지만, 오금역 이집의 닭볶음탕 맛도 다행히 여간 맛있는 게 아니었다. 특별 초청된 不繫(창인)이는 원래 닭볶음탕 귀신이다, 아무 식당에서나 닭볶음탕이 없으면, 날달걀이라도 반드시 특별 주문해 먹는 친구다. 이날 추석연휴 끝나고 밀린 환자 15명을 진찰하고 잔뜩 피로해진 가운데. 좋아하는 닭요리에 소주 한 참 기울이고 불콰하니 기분 좋아진 모습이다. 옆에서 지켜보는 자전거 친구로서 덩달아 흐뭇해졌다.

 

가을의 한 가운데로 접어드는 송파의 저녁. 우정의 상징이 돼 버린 닭볶음탕 집에서의 이날 성지모임은 모두의 이심전심 속에 오랜 우정을 더 두텁게 하는 벽돌 하나를 더 올려놓았으리. 유쾌했던 만찬을 마치고 다음 달 모임에서의 재회를 기약하며 아쉬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오늘도 변함없이 일부는 근처 당구장으로 가고, 유치원 동창생 만취와 불계, 수작의 아쉬움이 아직 큰 일부는 더 자리에 남아서 뒤풀이를 하고.♡♡

 

 

♣♣

 

이날의 모습들 사진

 

홍이네 가는 길


 

반갑네 친구들


 

시간 전에 온 친구들 -우정이 더 깊다는 뜻!?



    

유치원동창생끼리 


 

모두 모여 즐겁게


 

      

 

 

♣♣   

 

 

 

 

닭도리탕

 

다음 카페 경산시 행정동우회-바우리 글 (201446일자)

 

퇴근길이었다.

아까부터 서너 걸음 뒤로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앞엔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 낯익은 모습의 초라한 행색의 한 중년 여인이 있었다.

누구지?

가물가물한 기억 속에서 잃어버린 시간 한 토막이 문득 스쳐 지나간다.

바로 친구 형용이의 부인이다.

 

그래 20여 년 전 결혼식하고 서울 근처에 신접살림 냈다며 경기도 부천역 부근의 방 둘 짜리 300만원 전세 집에서 친구들 불러 집들이했던 중학 동창 조형용의 부인이었다.

차린 건 많지 않았지만 정성이 묻어났고 우리는 그날 맥주와 소주를 벗 삼아 옛 얘기하며 밤을 지새웠지.

그리고 그게 전부였나 보다.

그 친구는 리비아의 아랍대수로 건설 공사 현장으로 떠났고, 무심한 우리들은 그 뒷 소식조차 챙겨보지 않은 채 여기까지 달려왔다.

운 좋게 아직 대기업 계열사에 부장으로 있는 난 그래도 형편이 나은 편이었다.

부천 집들이에 갔던 벗들도 하나 둘 명퇴다, 정리해고다, 구조조정이다 하는 두어 차례의 칼바람을 벗어날 수 없었고 요즘은 아예 모임 자체가 형상화된 셈이다.

가끔씩 생각 나 홀로 포장마차에서 비우는 소주와 벗하는 추억으로만 곱씹곤 했다.

 

그런데 그녀가 왜?

이름을 기억 못하는 내 머리에 너무 화가 났지만

"... 혹시 형용이 부인... 아니시던가요?"란 말로 그녀에게 첫 말을 건넸다.

그녀는 어색하고 또 부끄러운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지금 남편이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고 답한다.

반갑기도 했지만 무슨 급한 상황이 생겼다는 느낌에 함께 그곳에 가자고 했더니 갈 수가 없다고 한다.

남편은 중동에서 돌아와 그럭저럭 거기서 번 돈으로 지내왔는데 3년 전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과 항암치료를 반복하던 끝에 결국 다음 주면 생을 마감할 거라는 병원의 통보를 받았다는 거다.

그러면 이승을 떠나기 전에 얼굴이라도 봐야겠다고 하니 그제서야 그녀는 내게 용건을 말한다.

아무도 없어 나를 찾아왔노라고.

중환자실 입원 이전까지 나온 병원비는 부천에 있는 아파트를 처분하고 어렵게 사는 친정아버지로부터 도움을 받아 지불했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는 거였다.

병원 측은 당장 이삼일 내로 밀린 병원비 3천만 원을 내지 않으면 강제로라도 내보내겠다는 거였다.

평생을 가족 위해 살아온 남편에게 하늘나라로 가는 길이라도 편하게 해드리고 싶다는 눈물 섞인 형용의 부인의 말에 억장이 무너지는 걸 느꼈다.

 

그런데 어떻게 하지?

나라고 월급쟁이인데 뭔 대수가 있을까?

순간, 카톡을 통해 온라인상으로 자주 대화가 되는 벗들이 떠올랐다.

일단 형용의 아내를 집으로 데리고 함께 들어갔다.

거실에서 집사람과 옛 얘기 잠깐 시키고는 동창생의 마당발인 이시무라는 이름의 총무에게 전화를 했다.

사정이 이런데 내가 좀 여유가 있으니 1천만 원 마련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그러자 시무는 자기도 은행 빚이 없는 건 아니지만 거의 정리되었고 보험 겸 저축상품 장기 가입한 거 해지하면 5백만 원은 모을 수 있다는 거였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친구들에게 사정을 전하겠다고 했다.

많은 동창들이 적게는 몇 만원에서부터 많게는 수 백 만원에 이르는 돈을 앞서거니 뒷 서거니 시무 계좌로 보냈다.

 

형용은 3천만 원 조금 넘게 돈이 모아지던 날 새벽 눈을 감았다.

마지막 힘을 다해 친구들에게 하늘에 가서라도 그 은혜 갚겠다는 말을 아내와 두 남매 앞에서 남기고.

우린 모두 벽제 장례식장에서 그를 한 줌 재로 보냈다.

돌아오는 길 진관사길 하늘은 잿빛이었다.

아니, 우리 모두의 가슴은 먹빛이었다.

차창도 울고 가로수도 울었다.

우리 모두가 울었다.

10여 년 전의 일은 그렇게 우리들 기억에서 서서히 지워져가고 있었다.

 

세월이 흘렀다.

형용의 부인은 서울 변두리에서 테이블 두 개짜리 조그마한 닭도리탕 집을 냈다.

처음엔 모든 게 서툴렀다.

설익은 감자를 내동댕이치며 육두문자로 시비 거는 주정꾼들은 그래도 나은 손님이었다.

인근에 먼저 영업 하던 큰 식당 주인 부부가 와서 괜시리 욕하며 여자 혼자 남자 꼬시려고 하느냐며 비아냥거릴 땐 세상을 원망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녀는 그 모든 걸 딛고 섰다.

먼저 가장 신선한 채소와 가장 맛있는 고추 가루를 확보했다.

그리고 김치며 밥을 손수 정성껏 만들었다.

육수를 만들기 위해 별도로 닭 두 마리를 따로 투자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쳐 그녀는 다른 곳에선 도저히 맛볼 수 없는 최고의 닭도리탕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

인근에 금세 소문이 퍼졌다.

그 맛과 정성이 명성을 만들었다.

'식객'을 쓴 허영만 선생이 찾아와서는 최고의 찬사와 함께 '조선반도 최고 닭도리탕' 이라 쓴 사인을 남겨줬다.

그렇게 해서 "조형용 닭도리탕"은 지금 월 매출만 1천만 원이 넘을 정도로 단골이 늘었고, 상표등록까지 마친 서울 최고의 맛 집이 되었다.

 

밴드를 통해 늘 만남을 실천해온 번개 파들은 누구랄 것도 없이 "조형용 닭도리탕"에 모여들었다.

동창 6백 명 가운데 그 집 모르는 친구는 없었다.

멀리 천안에서, 강릉에서조차 가족들? 서울 행사를 그 집에서 했다.

괴산에서 프리 랜지로 들판에 풀어놓고 키우는 토종 자연 청정 양계업을 하는 또 다른 동창이 그 소식을 접하고는 영원히 최고의 닭을 생산원가에 납품하기 시작하면서 식사 때마다 대기하는 손님 줄이 2백 미터 넘게 길게 늘어설 정도였다.

 

형용의 아들은 가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반듯하게 자랐다.

바르게 자식 교육에 힘써온 어머니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지금은 한국의 국가대표 기업인 현대 자동차의 전략기획실에 입사, 글로벌 마케팅 아이디어로 국가의 부를 창출하는 초석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늘은 정말 기분 좋은 날이다.

형용의 아내가 내게 문자를 보냈다.

"혹시 저도 형용씨 친구분들 밴드에 정식 멤버로 가입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는 없는가요?"

물론 예쓰다.

누구에게 물을 것도 없이 예쓰다.

그리고 이 기쁜 소식을 시무에게도 전했다.

시무는 고지할 것도 없이 우리 모두를 이렇게 결속시켜준 형용이 가입하는 것보다 100배 더 반가운 일이라며 그녀를 밴드로 불렀다.

 

그녀는 밴드가입 인사를 이렇게 했다.

 

"세상에... 저는 수어지교니 문경지교니 하는 말들은 그냥 책에서나 있는 말이라 생각했어요.

그런데 형용씨가 친구들한테 잘 한 것도 없는데 어쩌면 친구들의 사랑이 이렇게 클 수 있는지 참으로 고마웠어요.

전 정말 기대하지도 못했어요.

제가 그 은혜 평생 갚아나가며 살 게요.

그리고 형용씨와 제가 만들어 키운 저희 큰 녀석이 지난달 좋은 아이디어로 마케팅 실적 높였다는 공로로 회사로부터 특별 인센티브 5천만원을 받았습니다.

그 돈 전액을 저도 회원이 된 이 밴드, 바로 우리 남편의 동창생 모임의 기금으로 기부하고자 합니다."

 

그녀는 바로 우리 모두의 우정이었고, 우리 모두의 사랑이었다.

우리 모두는 뜨거운 물줄기가 눈가에서 흘러내리는 걸 그 밴드 글 읽으며 억제할 수 없었다.

친구의 이름으로 살아있는 그 닭도리탕집은 전 세계 어떤 식당보다도 가장 눈물깊은 사연을 안고 출발했다.

하지만 어떤 식당도 해내지 못한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럽고 편안한 벗들의 안방이 되었다.

 

오늘 봄볕이 무척 따사롭다.

이 저녁, 퇴근길이 무척이나 가볍다.

아니 기대가 가득하다.

분명, 굳이 밴드에 고지하지 않아도 늘 600명 가운데 10여 명은 그곳에서 감자와 닭다리를 뜯으며 살아있음에 감사하고 웃고 떠들 수 있을 거라는 기대로 말이다.

 

사랑과 우정의 크기는 어느 게 더 클까?

그 부등호의 결말을 혼자 셈해보며 회사를 나선다.

오늘은 형용의 아내를 위해 그녀가 좋아하는 오메기떡 한 봉지를 사가야겠다. --

 

~~~친구라는 힘있는 우정과 사랑을 생각하게 하는 감동적인 글 이었습니다...